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문단 편집) == [[윈스턴 처칠]] == 꽤 험악했지만 상대방이 뛰어난 인물임을 인정했다. 윈스턴 처칠은 전통적인 제국주의자였고 장제스는 영국을 침략자들로 보아 매우 혐오했다. 이후 홍콩 문제나 조계지 문제로 영국과 중국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중일 전쟁이 터지면서 협력 관계가 된 후에도 영국은 장제스가 동남아에 영향력을 확보할까봐 중국과 험악한 사이였다. 또한 전후 처리에(특히 일본의 식민지 처리)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는데 장제스는 조선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반면에 처칠은 이에 대해서 애매한 입장이었고 장제스가 만주, 타이완의 회복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재점령' 야욕이라고 상당히 좋지 않게 보았다. 게다가 처칠은 끝까지 장제스를 카이로 회담에 불러오는 것을 반대했으며[* 이 부분은 스탈린 역시 마찬가지.] 불러온 다음에도 피라미드 관광이나 시키자는 입장으로 중국을 우습게 봤고 결국 중영의 험악한 관계는 카이로 회담 내내 지속되었다. 그래도 처칠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조용하고 신중하며 민완하다고 평가했다. 또 처칠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제스가 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으로 물러난 것은 애석한 일이며 자신은 카이로에서 장제스, 쑹메이링과 촬영한 기념 사진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 등 나름의 애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장제스도 처칠을 제국주의자 우두머리라고 욕하곤 했으며 카이로 회담 도중에는 이런 악감정이 더 심해져서 루스벨트와 동렬에 놓을 수 없으며 속이 좁고 교활하며 이기적이며 완고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 이후에는 처칠이 그래도 걸물이라고 인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